이 세상 어딘가에 비밀의 방 하나가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잠입자>였을 것이다. 잠입자가 안내하는 그 방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방이다. 입으로 이야기한 소원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이 품은 진짜 소원을 들어주는 곳이다.
자기 때문에 죽은 형의 소생을 그 방에서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형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었다. ‘발설한 소원’이 아니라 자기 안의 내밀한 소원을 확인한 그는 목을 맸다. 그 방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진짜 소원이 이뤄질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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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비가 있는 언덕으로 오르는 길. 예수의 고난을 돌에 새긴 열 네 개의 부조가 놓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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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리 아퍼 죽겄어도 나 낫게 해달라는 기도는 안혀. 그놈 소원 먼저 들어주실까니.” 나바위 성당(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아래 화남마을 사는 김옥순 마리아(76) 할머니의 기도법을 들었을 때 그 방이 떠올랐다.
한 점 두려움 없이 비밀의 방문을 열 수 있는 투명한 소원이었다. “젤 먼저는 이 자식 저 자식 다 넣고 기도허고, 빠진 것 같으믄 한나 빼묵었다고 더허겄다고 그러제. 그런다고 숭보시겄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너른 품을 나바위 성당 언덕 ‘고난의 길’에서 만난다. 피 흘리는 자식을 보듬은 애잔한 어미의 모습, 피에타가 있는 곳이다.
“거그 십자가의 길부텀 가봐. 매맞는 것 딱허고, 가시관 쓰는 것 억울혀….” ‘나바위 성지’ 표지석 아래서 만난 할아버지는 그 딱하고 억울한 사람이 바로 유제사람이라도 되는 양 그 사정부터 들여다보라 했다. 할아버지 일러 준 대로 그 딱한 사람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따라 오른다.
나바위 성당에서 순교비가 있는 언덕 위까지에는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형장으로 올라가던 고난의 순간들을 돌에 새긴 열 네 개의 부조가 놓여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곳임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다.
뉘라도 고개 숙여 제 안을 들여다보게 되는 숲길. 제 안의 헛된 바람들 그만 내려놓고 싶어지는 숲길이다. 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건 ‘망금정(望錦亭)’이라는 현판을 건 정자. 바닥도 앞도 뒤도 온통 너럭바위에 앉혀진 이 정자에 들면 이름 그대로 들판 너머 은빛으로 반짝이며 누워 있는 금강이 바라보인다.
그 옆으론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의인은 향나무처럼 치는 도끼에 향기를 묻히나니…> 그이라면 능히 그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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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바위 위에 자리한 망금정 너머 멀리 금강이 바라다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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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비 언덕까지 예수 고난의 순간들 새긴 14개 부조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그런 이름을 얻었을까. 우암 송시열이 ‘화산(華山)’이라 이름한 산.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이 작은 산이 어디서든 눈에 드는 것은 너른 평야 한가운데 솟아 있는 까닭이다. 이 산의 줄기가 다하는 지점에 펼쳐진 너른 바위가 나바위(羅巖). 조선시대엔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전하던 봉화대가 이곳에 있었고 정부미를 실어 나르던 창고가 있어서 나암창이라고도 하였던 곳이다.
“지금은 논밭이지만 왜정 때 금강둑 쌓기 전에는 금강물이 화산 절벽 아래 찰랑찰랑찰랑 했다고 그려.” 이 마을이 탯자리라는 권보물 벨라데따(71)할머니. ‘찰랑찰랑찰랑’하는 대목에서 특별히 손을 크게 흔들어 눈앞에 넘실넘실 금강물을 그려 보인 것은 그래야만 그 나바위 발끝 아래 닿았던 배 한 척을 설명할 수 있어서일 게다.
배의 이름은 라파엘호. 상해를 출발한 지 42일 만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중국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그 배 안에 있었다. 외래 종교에 대한 수모와 박해 속에서 특히 평등사상을 앞세운 기독교는 조선 후기의 계급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던 까닭에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신부가 된 앙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이 곳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1845년(헌종 11년) 10월12일 밤의 일이다.
그로부터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했던 김대건 신부를 기리기 위해 1897년 장약실(베르모레) 신부에 의해 이곳에 최초로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318호)로 지정돼 있는 화산 성당(나바위 성당이라고도 한다)은 1906년 건립된 것으로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것.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이곳을 김대건 성인이 처음 전도한 곳으로 한국 기독교의 첫걸음이 시작된 곳이라 하여 성지로 지정하고 있다.
언덕 위에 있는 김 신부의 순교비는 1955년 당시 김 신부가 타고 왔던 돛단배의 실제 크기와 똑같은 높이로 만들어져 고난의 항해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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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옥을 얹은 기와와 고딕식 첨탑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화산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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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기와 얹은 성당이 고딕식 첨탑과 어우러지고 한옥 기와를 얹은 성당이 고딕식 첨탑과 어우러진 풍경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온화한 한지로 바른 창문들도 고요하게 마음에 안겨 든다.
“가운데 졸졸허니 기둥을 봤는가 몰겄네.” 마을 앞 점방 평상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낯선 처자가 구경을 똑바로 한 것인지 점검을 하고 싶으신 모양이다. “전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혔잖어. 그런게 남자 여자를 갈르고 기둥에다 커튼을 달았다드만. 기도헌디 잡념이 들어간다고. 신부님만 쳐다보라고. 인자는 안허지. 인자는 남녀칠세부동석 아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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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로 바른 창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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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이 성당 자랑을 할 요량으로 내세운 것은 <단팥빵>. “테레비에서 단팥빵이라고 연속극 허잖어. 거기 나오는 아가씨가 신부님 된다는 총각을 만나러 오믄 그 때마다 우리 나바우성당이 나오는디 못봤는개비네에.” 그걸 못 본 사람하고 얘기를 하자니 답답한 모양이시다.
“우리는 우리끼리도 하루에도 몇번은 말혀. 여기가 참 복받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래.” 성당 발치에 있는 화산리 화남마을 사람치고 화산성당 신자가 아닌 이는 드물다 했다. “전에는 여산 금마에서도 저어 용동에서도 큰참례를 보러 와. 지금도 관산 망성에서도 와 왕촌 신용에서도 오고.”
이 땅에서 가톨릭이 가장 어려웠던 1929년에도 신도수 320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이었던 화산성당.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는 역경 속에서 지역민들의 어려움을 껴안아 왔던 화산성당은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교육에 힘을 기울였고 1949년부터는 간이진료소라 할 수 있는 시약소를 설립하여 1987년 폐쇄될 때까지 가난한 농민들의 건강을 돌보아왔다.
“우리 성당이 신사참배를 없앴다고 해서 신부님이 광주교도소에 갇혀 있었어. 얼마나 곧은 일이여. 울 어무니가 거그까지 면회를 다녔네.” “6·25 나서도 우리 신부님은 죽기로 성당을 지켰어. 하루 이틀인가만 미사를 빼묵었제.” 오랫동안 서로 굿굿하게 지켜 온 그 한가지 믿음은 마을 어르신들의 자부심이었다.
“우리 마을은 큰소리가 없어. 입다툼을 혀도 그 즉시로 없던 일로 하자고 그러지. 그대로 있으믄 죄시러워서 못살어. 그 놈을 안 풀고 울긋불긋 쳐다보믄 맘이 안 편혀.”
임철순 베드로(79)할아버지의 기도법을 마음에 아로새긴다. "기도라는 것도 내 맘대로 원하는 것이 아니여. 내가 원하는 것이 맞는가 틀린가 모른게. 내 뜻대로만 되믄 교만해서 못써.” 그러니 “당신 뜻대로 허고 자운 대로 허시라”고 기도한다는 어르신들.
성당을 머리에 이고 사는 화남마을 사람들의 사는 법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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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 순교비. 중국에서 타고 온 돛단배와 똑같은 높이로 만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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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익산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함열 쪽으로 가면 함열과 용안을 넘어 나바위성지라 불리는 화산천주교회로 향하는 조그만 포장도로를 만난다. 이 길을 타고 조금 더 가면 나바위성지에 도착하게 된다. 먹을 거리: 나바위 성당 바로 아래 용궁가든(063-862-4825)에 가면 구수한 시래기국 등이 나오는 소박한 백반이 4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