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 일년에 일주일 단 한 번 있는 휴가가 시작되는 날이다. 이번 휴가는 제주도에서 보내기로 하고 아침 8시 청주공항에서 떠나는 제주행 아시아나항공 비행기에 오른다. 애초에는 중국의 황산을 가려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함께 가기로 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황산 계획을 취소하고 말았다. 좋은 일이었다면 예정대로 황산에 갔을 것이다. 나 혼자만 천하의 명산을 보고 온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 대신 한라산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갑자기 행선지를 바꾼 까닭에 제주행 항공권도 어렵사리 구했다. 아마 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항공권을 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각 8시. 비행기가 굉음을 내면서 청주공항 활주로를 달리다가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휴가철이어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비행기 안은 만원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비행기는 수평고도를 유지한 채 하얀 구름바다 위를 날고 있다. 청주공항을 떠난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바다가 보이고 곧 제주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흘러 나온다. 비행기는 고도를 점점 낮추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제주공항 활주로에 내려 앉는다. 따로 수화물로 부친 배낭을 찾아서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이용 제주시내에 있는 버스터미널로 갔다. 터미널 식당에서 순대국밥으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10시에 떠나는 어리목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한라산 등산지도
*어리목 매표소
어리목을 넘는 도로를 1100도로라고도 한다. 1100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일명 '도깨비도로' 또는 '신비의 도로'가 나타난다. 도깨비도로의 가장 낮은 곳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면 마치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오르막길로 올라가는 신기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착시현상으로 인한 것인데, 나도 전에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어리목으로 오를수록 길이 가파라지고 굴곡도 심하다. 한라산이 화산지대라서 그런가 보다. 사실 제주도 자체가 그 옛날 한라산과 그 외 수많은 기생화산의 분화구에서 흘러내린 용암지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제주도의 흙 색깔을 보면 대개가 검은색이다. 버스기사는 앞쪽 문을 열어놓은 채 운전을 한다. 더위에 지친 승객들을 위해 바람을 맞아 들이기 위해서다. 안전수칙에는 어긋날지 모르지만 이렇게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어느 정도 융통성도 필요하다.
어리목에 가까와질수록 한라산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어온다. 40분 정도 걸려서 해발 970m인 어리목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등산로 입구 매표소까지는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어리목 매표소로 가는 길가에는 철책을 세워서 밀림을 보호하고 있다. 표를 사서 어리목 광장으로 들어간다. 광장에는 등산객들이 타고온 차량들로 꽉 차 있다.
*어리목 등산로 입구
여기서부터 윗세오름까지는 4.7km. 빨리 걸으면 두 시간, 쉬엄쉬엄 천천히 걸어도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몇 년 전 눈이 많이 쌓인 겨울에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을 거쳐 영실로 내려간 적이 있다. 그 때는 한라산 전체가 눈에 덮혀서 설해의 장관을 보았데, 오늘은 푸르른 녹색의 바다로 변해 있다.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에 이르는 등산로는 험하거나 가파르지 않아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산행을 하면 된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더니 주변의 오름들을 순식간에 감춰 버린다.
*민대가리동산과 어리목계곡
*어리목 등산로
일단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사제비동산까지는 전망이 좋은 곳이 거의 없다. 그래서 구름이 잠시 물러간 틈을 타 등산로 초입에서 작은두레왓과 민대가리동산, 사제비동산, 그리고 어리목계곡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어승생오름에서 사진을 찍으면 능선과 계곡이 훨씬 더 잘 조망이 될 텐데..... 가운데 보이는 봉우리가 민대가리동산(1600.5m)이고 왼쪽 봉우리는 작은두레왓(1339.2m), 오른쪽 봉우리는 사제비동산(1423.8m)이다. 민대가리동산 양쪽을 지나 작은두레왓과 사제비동산 사이를 흐르는 계곡이 어리목계곡이다. 작은두레왓 능선은 큰두레왓과 장구목오름을 지나 백록담 분화구 북벽에 이른다.
'왓'이란 벌판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으로 돌들이 널려 있는 넓은 지대를 말한다. '오름'은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분출물이 쌓여서 퇴적된 기생화산구(寄生火山丘)를 이르는 제주도 사투리로 한라산 기슭의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봉우리들을 일컫는다. 오름의 정상에는 대부분 크고 작은 분화구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제주도에는 이런 기생화산이 약 380여 개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밀림 사이로 난 등산로
활엽수가 빽빽하게 꽉 들어찬 숲길로 들어서자 마치 열대의 밀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키가 큰 활엽수들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다. 산기슭에는 키작은 산죽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등산로에는 토양침식을 막기 위해 사각의 목재기둥으로 계단길을 만들어 놓았다. 시원한 숲그늘 속을 걸어가노라니 산림욕이 따로 없다. 한여름의 무더위도 이곳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는 듯하다.
*송덕수
어리목계곡을 건널 때서야 비로소 하늘이 빠꼼하게 나타난다. 계곡을 건너면서부터 경사가 조금 가파라지기 시작한다. 군데군데 만들어 놓은 쉼터에는 산행에 지친 등산객들이 땀을 식히고 있다. 송덕수(頌德樹)라고 불리는 엄청나게 큰 물참나무 그늘 아래 있는 쉼터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나이가 500살이나 되었다는 이 나무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 오고 있으니.....
조선 정조 18년(1794)에 이른바 갑인흉년이라고 하는 큰 기근이 들었다. 제주도에도 집집마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착한 계집종은 초근목피라도 캐어 주인집 식구들을 구하고자 이곳까지 왔을 때 허기에 지쳐 그만 이 나무밑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온 몸이 도토리로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도토리를 주워모아 주인집 식구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흉년이 들 때마다 이 나무를 찾아가 보면 언제나 도토리가 쌓여 있어 기근을 면할 수 있었다. 그후 그들은 해마다 이 나무를 찾아 감사의 제사를 올리고 나무의 덕을 칭송하였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이 나무를 송덕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길고도 긴 활엽수 숲 터널길을 다 올라가면 바로 사제비동산이다. 전망이 좋은 사제비동산에 오르자 가슴이 탁 트이면서 시원한 느낌이 든다. 정상부에는 산죽이 무성하게 우거진 군락지가 있다. 산죽의 바다라고나 할까! 옛날에는 이곳에다가 말을 풀어놓아 방목을 했다고 한다. 사제비동산 어귀에는 사제비약수라는 샘터가 있어 마실 물을 얻을 수 있다.
해발고도가 1423.8m에 달하는 사제비동산은 희귀식물과 특산식물의 보고인 아고산(亞高山)지대가 시작되는 곳이다. 최근 사제비동산에서 애기수영, 토끼풀, 개망초, 서양민들레 등 외래식물 5종이 발견돼 생태계의 교란이 염려된다는 학자들의 연구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외래식물이 들어와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조차 자연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멀쩡한 땅에다 금을 긋고 철조망을 치는 것은 인간들이나 하는 일이지 식물들은 네 땅 내 땅을 가리지 않는다. 어디서나 평화적인 공존을 모색하는 식물들로부터 인간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사제비동산에서 바라본 만세동산(일명 만수동산)
*흰그늘용담
사제비동산과 만세동산 사이는 넓은 초원지대다. 길가에는 조밥나물, 흰그늘용담, 고추나물, 솔나물, 가시엉겅퀴, 금방망이, 백리향, 호장근, 층층잔대, 흰범꼬리, 섬쥐손이풀 등 온갖 풀꽃들이 피어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이 중에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산희귀종도 있다. 백리향을 살살 쓰다듬어 주자 향기가 진동을 한다. 향그러운 향기가 백리나 날아간다는 백리향.....
*해발 1500m임을 알리는 표지석
만세동산으로 오르는 언덕길 중간쯤에 이곳이 해발 1500m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한가로이 흘러가고 태양은 머리 위에서 뜨겁게 불타는 듯 하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에 살갗이 따갑다. 그래도 고원지대를 거슬러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초가을을 연상케 한다.
만세동산에 이르러 지나온 사제비동산을 돌아본다. 초원을 가로질러 사제비동산과 망체오름(일명 쳇망오름,
1355m)이 솟아 있다. 사제비동산 왼쪽으로 보이는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봉우리가 망체오름이다.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밭는 데 쓰는
체처럼 가운데가 들어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만세동산
만세동산(일명 만수동산, 1604m) 표지판을 지난다. 한라산은 생태계의 보호를 위해 정해진 등산로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만세동산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만세동산 산기슭은 온통 산죽숲으로 뒤덮여 있다. 어리목에서 여기까지는 3.2km의 거리다. 이제 1.5km만 더 가면 윗세오름 대피소에 이르게 된다.
*만세동산에서 바라본 백록담 분화구와 장구목 오름
만세동산을 오른쪽으로 두고 돌아가면 문득 백록담 분화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장구목오름(1860m) 뒤로 거무튀튀한 용암으로 이루어진 분화구가 장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북쪽에서 몰려오는 구름이 쉴 새 없이 분화구를 넘어간다. 그럴 때마다 분화구가 마술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한다. 장구목오름의 광대한 초원지대를 바라보니 눈이 다 시원하다. 만세동산 북쪽 산기슭에는 구상나무 군락지대가 있다. 이곳에서부터 토양의 침식을 막고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널빤지를 깔아서 만든 길이 시작된다. 아름답게 피어 있는 들꽃들을 구경하면서 걸어가노라니 꼭 산책을 나온 기분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행복감.....
*만세벌판에 세워진 해발 1600m 표지석
*만세벌판
구상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바로 광활한 만세벌판(일명 만수벌판)이 시작된다. 널빤지로 만든 길은 만세벌판을 가로질러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이어진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윗세오름 대피소가 아스라이 보인다. 바로 앞에 보이는 봉우리는 윗세오름 가운데 하나인 붉은오름(큰오름, 1740m)이다. 바로 그 너머에 있는 백록담 분화구는 구름에 휩싸인 채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붉은오름 오른쪽에 있는 봉우리는 역시 윗세오름 가운데 하나인 누운오름(샛오름, 1711m)이다. 만세벌판에도 벌노랑이, 구름떡쑥, 기름나물, 참싸리, 개미취, 타래난초, 섬쥐손이풀, 백리향, 곰취, 참취, 미역취, 여로, 미나리아재비, 한라고들빼기, 톱풀, 흰범꼬리 등 수많은 야생화들이 활짝 피어 있다. 이 가운데는 한라산에서만 자라는 특산희귀종들도 보인다. 풀꽃들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백리향의 향기에 취한 채 만세벌판을 미음완보하면서 천천히 가로질러 간다.
*오름약수
만세벌판에는 오름약수가 있다. 바위틈에 박아놓은 대나무통을 타고 맑은 물이 졸졸졸 떨어진다. 약수를 떠서 한 모금 마시니 물맛이 달고 시원하다. 이렇게 높은 곳에도 샘이 있다니..... 한라산이 명산은 명산이다.
*붉은오름 기슭에 있는 윗세오름 대피소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어서 윗세오름 대피소(1700m)에 도착했다. 대피소는 윗세오름 가운데 가장 높은 붉은오름과 누운오름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윗세오름은 '위에 있는 세 오름'이라는 뜻으로 백록담 분화구 서쪽에 나란히 솟아 있는 세 오름을 일러 말한다. 그 첫번째 오름이 붉은오름이고, 두번째가 누운오름, 세번째가 족은오름(새끼오름, 1699m)이다. 점심 때도 지난지라 배가 출출하다.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하나 사서 점심을 때운다.
*윗세오름 정상 표지석에서
윗세오름 뒤로 분화구(1950m)가 가깝게 보인다. 구름이 피어 오르는 분화구에 신비스운 기운이 감돈다. 윗세오름에서 분화구까지는 자연휴식년제에 들어가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표지석 뒤로 난 길을 따라 장구목오름을 지나 분화구 북벽에 이를 수 있다. 윗세오름에서 북벽을 올라보고 싶었는데 아쉽기 짝이 없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지리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남한의 가장 남쪽에 있으면서도 가장 높은 산이다. 한반도의 북쪽에는 백두산, 남쪽에는 한라산이 조선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한라산 정상 해발 1950m 지점에 있는 분화구에서 분출된 용암에 의해서 현재의 제주도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러니 한라산은 제주도의 어머니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라산에는 맹수가 없어서 노루와 같은 초식동물들이 많이 살고 있다. 또한 식물분포도 세계적이다. 한라산의 고도에 따라서 아열대와 온대는 물론 한대성 식물까지 고른 분포를 보인다. 현재 한라산에는 1800여종 이상의 식물과 4000여종에 이르는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록담은 한라산 정상에 있는 신생대 제3,4기의 화산폭발로 생긴 분화구에 물이 고여 형성된 타원형 화구호(火口湖 crater lake)이다. 둘레는 약 3㎞, 동서길이 600m, 남북길이 500m의 규모로 높이 약 140m의 분화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분화벽은 북벽보다 남벽이 더 높다. 백록담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신선들이 이곳에서 백록주(白鹿酒)를 마시면서 음풍농월을 했다는 전설과 흰 사슴으로 변한 신선과 선녀의 전설 등에서 유래한다. 다른 기생화산과는 달리 백록담에는 일년 내내 수심 5~10m의 물이 고여 있다. 분화구 서벽은 화산활동 초기에 분출한 백색 알칼리 조면암이 심한 풍화작용을 받아 생긴 주상절리가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반면에 동벽은 후기에 분출한 현무암으로 되어 있어 서벽과 차이를 보인다. 분화구와 절벽에는 눈향나무 등 고산식물이 자라고 있다. 백록담에 쌓인 흰 눈을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고 하는데 제주 10경의 하나로 꼽힌다. 지난해 가을 내가 백록담에 올랐을 때 녹담만설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윗세오름 대피소 울타리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
윗세오름에는 까마귀들이 많이 살고 있다. 등산객들이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던져 주면 쏜살같이 달려와 물고 간다. 어떤 까마귀들은 아예 대피소 울타리에 앉아서 사람들이 먹이를 던져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의 까마귀들은 사람들에게 이미 적응이 잘 되어 있는 듯 하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도 무서워하거나 달아나지도 않는다. 윗세오름 대피소 주변에서 곰취군락지를 발견했다. 노오란 곰취꽃이 한창 피어나는 중이다. 갈퀴나물꽃과 제주달구지풀꽃도 보인다. 제주달구지풀은 한라산 특산식물이다.
*영실 등산로
윗세오름에서 하루만 머물다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의 밤하늘에 뜬 별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저 대초원 위에 누워서 초롱초롱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잠들고 싶다. 하지만 한라산 일대는 숙박과 야영이 금지되어 있어 당일산행만 허용되고 있다. 훗날을 기약하며 윗세오름 대피소를 떠난다. 붉은오름과 누운오름 사이로 난 널빤지길을 따라서 영실로 향한다. 선작지왓 입구에 이르러 떠나온 윗세오름 대피소를 되돌아 본다. 키작은 상록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붉은오름 서쪽 기슭 끝자락에 대피소가 보인다. 그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가 장구목오름이다. 장구목오름 남쪽 사면에는 드넓은 대초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누운오름(샛오름)
누운오름은 윗세오름의 한가운데 있는 오름이다. 누운오름도 군데군데 검은색을 띤 용암들만 드러나 보일 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초원지대다. 이곳은 바람이 워낙 거세게 불어오기 때문에 나무가 자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풀들도 그런 환경에 적응한 탓으로 키들이 매우 작다.
*노루샘
붉은오름과 누운오름 사이로 남쪽을 향해서 나 있는 널빤지길은 선작지왓 어귀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노루샘은 바로 길이 꺽이는 지점에 있다. 물이 떨어지는 곳 주변에 녹물이 벌겋게 침착되어 있어 철분이 함유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가지로 물을 떠서 한 모금 맛을 보니 시원하고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족은오름(새끼오름)
영실로 가는 길은 누운오름과 족은오름의 기슭을 따라서 나 있다. 족은오름은 누운오름 서쪽 바로 옆에 있는 오름이다. 족은오름도 나무가 거의 없는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작지왓에서 바라본 백록담 분화구
선작지왓의 끝자락에 서서 지나온 윗세오름을 되돌아 본다. 선작지왓 대평원을 가로질러 백록담의 거대한 분화구가 위압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분화구 바로 앞에 있는 오름이 붉은오름이다. 선작지왓의 '선'은 '서다' 또는 '살아있다'는 뜻의 '생'에서 온 말이고, '작지'는 '조금 작은 돌', '왓'은 '넓은 들판' 또는 '벌판'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선작지왓은 '작은 돌들이 널려 있는 넓은 벌판'이라는 말이다. 윗세오름과 분화구 남벽, 그리고 방아오름(1666m), 영실기암능선 사이에 있는 선작지왓은 수십만 평에 이르는 광활한 고원평야 지대로 봄철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겨울에는 윗세오름과 선작지왓 전체가 눈으로 덮혀 그야말로 백색의 설원이 된다. 구상나무들은 하얀 눈옷을 입은 채 기기묘묘한 조각상으로 변한다. 겨울에 이 대설원을 거닐어 보면 아름답고 멋진 설경에 그만 숨이 막힐 지경이 되고 만다. 몇 년 전 겨울에 이곳에 올랐을 때 나는 그런 경험을 한 바 있다. 오늘은 대설원 대신에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녹색의 바다가 장관이다.
선작지왓에서 구상나무 군락지에 이르면 영실기암 능선이 시작된다. 영실계곡을 바라보면서 왼쪽 능선이 오백나한상이 있는 능선이고, 오른쪽 능선은 병풍바위가 있는 능선이다. 등산로는 병풍바위가 있는 능선을 따라서 내려가게 되어 있다.
*병풍바위 절벽 위로 나 있는 등산로
병풍바위가 바로 밑에 있는 곳에 다다르자 짙은 안개가 몰려 온다. 등산로 아래는 까마득한 바위절벽이다. 오백나한상도 병풍바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한라산 산신령님이 영실기암을 보여주시지 않으려 함인가 보다. 능선길 주위에는 네귀쓴풀, 솔체꽃, 어수리, 술패랭이 등과 같은 야생화들이 피어 있다. 네귀쓴풀꽃이나 솔체꽃, 술패랭이꽃은 야생에서 처음 보는 꽃들이다.
안개가 잠깐 걷힌 사이 병풍바위를 찍으려고 하니 아뿔싸 카메라 건전지가 다 닳아버린 것이 아닌가! 아쉽지만 사진을 찍는 것을 포기하고 능선길 주위에 피어 있는 야생화들을 살펴 보기로 한다. 짙은 안개가 영실계곡 아래쪽에서 계속 몰려오고 있다. 안개로 인해 오백나한상은 전혀 보지도 못 했다. 영실로 내려가는 길은 비록 가파르기는 하지만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힘들지는 않다. 반대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꽤나 힘이 들 것이다.
등산로 입구에 가까이 오면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나타난다. 붉은 빛이 도는 소나무들이 점잖고 품위가 있어 보인다. 이 숲은 2001년 산림청과 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로부터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천년숲으로 지정된 바 있다. 영실 소나무숲이 보전해야 할 천년숲으로 지정된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자연은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할 빚이기 때문이다. 해발 1280m에 위치한 영실휴게소로 내려오면 사실상 산행이 끝난다. 영실휴게소에서 매표소까지의 2.3km는 걸어서 가든가 차량을 이용하면 된다. 매표소까지는 내리막길이라 걸어서 가기로 한다.
한라산은 백록담 분화구를 비롯해서 수많은 오름들, 사방으로 뻗어가는 능선들과 깊은 계곡,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밀림, 고원의 대평원, 그리고 여기 깃들어 살아가는 동물들과 특산희귀종 식물들로 인해 한국의 100대 명산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라산은 동시에 현대사의 비극으로 빚어진 생채기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4.3제주민중항쟁을 말없이 지켜 보았을 한라산..... 4.3항쟁은 미군정과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한 제주도민들의 순수하고 거룩한 투쟁이었다. 제주도는 이미 그 전에도 몽고에 대한 삼별초 항쟁으로도 유명한 곳이 아니던가! 4.3항쟁으로 인해 무고한 제주도 양민들이 무수히 학살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은 여기에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한라산을 내려가면서 4.3항쟁 희생자들이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받고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06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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